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잉글랜드 내전 (문단 편집) == 배경 == 1625년에 즉위한 [[찰스 1세]]는 아버지 [[제임스 1세]]의 <[[왕권신수설]]>을 굳게 믿고 있었다. 따라서 왕권을 수호하기 위해 [[1628년]] 강력한 [[상비군]]을 [[절대왕정|만들려고 했다.]] 그 [[세금]]을 거두는 과정에서 [[영국 의회|의회]]가 찰스 1세의 실정을 비판하며 왕의 자의적 권력 행사에 대한 구속을 골자로 하는'''[[권리청원]]'''을 통해 >'''의회의 동의없이 [[잉글랜드 국왕|국왕]]이 세금을 거둘 수 없다.''' 는 조항의 승인을 받아냈다. 찰스 1세는 재정 마련을 위해 의회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로 준수하지는 않았고, 더욱이 의회는 이듬해 1629년에 [[의회 해산|강제로 해산당했다]]. 이후 1640년까지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찰스 1세가 절대적 지배권을 행사했다. 1638년 [[스코틀랜드 국왕]]이기도 했던 [[찰스 1세]]는 측근인 대주교 윌리엄 로드를 시켜 [[스코틀랜드 왕국]]에 [[영국 국교회|잉글랜드 국교회]]를 신봉하게끔 새로운 기도서를 강요했지만, 대다수 백성이 [[장로교]]를 믿던 스코틀랜드가 이에 대항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찰스 1세]]는 강경 진압을 명했다. 그리고 1640년, 이 전쟁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의회를 다시 소집하게 되었다. 의회는 11년간 국왕이 저지른 폭정을 나열하며 반발하였다. 왕은 3주 만에 의회를 다시 해산하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와 화의 후 전쟁 배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의회를 재소집한다. 의회는 배상금을 갚기 위해서 세금이 절실한 찰스 1세의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오히려 국교회를 강제하는 정책을 폐지하고,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법안을 제정하였으며, [[https://en.wikipedia.org/wiki/Triennial_Acts|삼년법안]]을 통과시켜 의회가 3년에 한 번씩은 꼭 열리도록 만들었다. 그러다 1641년 10월, 아일랜드에서 잉글랜드의 통치에 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 수천명의 잉글랜드 주민을 살해했다. 국왕과 의회는 아일랜드 처벌에 이구동성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군령권|군사 지휘권]]을 둘러싸고 논쟁하다가, 간신히 타협한다. 그리고 의회는 왕의 실정 목록 200개 조항 및 의회 개혁안을 담은 [[https://en.wikipedia.org/wiki/Grand_Remonstrance|대간언]]을 통과시킨다. 1642년 1월, 격분한 찰스 1세는 칙령을 내림으로써 군대를 이끌고 반대파 의원 체포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의회도 그에 대비해 군대를 모았고, 국왕은 실패 후 북쪽으로 대피하였다. 의회는 도망자 왕을 비판하는 '''19개 제안'''을 공표하였다. 찰스 1세는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제안을 끝내 거부하였다(6월). 급기야 의회파와 왕당파가 각각 군대를 동원함으로써, 1642년 여름, 잉글랜드 내전이 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